추상과 겹침을 통한 존재론적 탐구

 

임산 /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

  이동(移動)하는 일상에서 사라짐과 나타남을 반복적으로 대하며, 그때의 기록과 감정을 축적하여 기억한 작가의 몸이 하나의 캔버스가 되었다. 특별한 몸짓을 취해서 그 느낌을 되살려 표현하는 데 능숙하기보다는 무척이나 불분명한 이미지들로 충만한, 알 수 없는 시공과 더불어 변덕스러워진 그런 몸이다. 과거의 서로 다른 순간의 편린들로 충만한 캔버스는 하나의 전체가 되어 마치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동력원처럼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동의 의식(意識)은 스치듯 지나가버린 뭇 생명과 사물들을 작가의 몸속에, 그리고 캔버스에 켜켜이 쌓아 꿈틀거리게 한다.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그 정체성의 여정은 몸을 구성하는 분자를 증식시켜 회화 공간의 깊이 속에 배열하였다.

  작가 허정원의 그림에서 상징의 기술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녀는 강릉-서울 사이 고속도로에서의 이동 중에 자동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촬영했다. 그렇게 생산된 이미지들은 그림의 주요 원재료이지만 풍경화로 단순 도식화되지 않는다. 연쇄 이미지들은 세상의 충만함 자체를 거두며 그녀의 여정을 대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의식의 부속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회화적 텍스트이기를 멈추고 추상화된다. 풍경을 렌즈에 담는 작가 자신을 ‘중심’을 둔 다음 ‘주변’을 개략(槪略) 변형시키거나, 혹은 미궁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중심’의 가시권에 들어온 ‘주변’을 적나라하게 강조하는 전형적인 풍경화와는 변별되는 허정원식 풍경화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허정원이 자신의 의식에서 유영하는 그 풍경의 시공(時空)을 추상으로 꾸려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앞서 언급한 허정원식 풍경화의 표현적 특징으로부터 유추해야 하는 바이겠지만, 예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의식의 산물을 상투적인 보편성의 허울에 가두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정체성의 확인 방식이라는 게 무수한 존재론적 싸움에서 승리한 하나의 ‘자기’가 패배한 또 다른 ‘자기’를 동류화함으로써 그 정당함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허정원은 의식의 재생에서 최후까지 남은 것들과 ‘주변’의 것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도 그림 내에 부여하지 않으려했다.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모종의 희생을 동반하는 보편성은 풍경 속에 타자를 배태하는 일반적 풍경화의 법칙을 따르는 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허정원의 추상은 육안의 한계 너머에 있는 시간을 불러내는 데서 확인되는 화가로서의 어쩔 수 없는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시선에 그치지 않는다. 화가가 자신의 일상에서 창조를 위해 확보하려했던 것을 다시금 현실의 프레임에 남겨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곧 일상에 기거하는 소재와 자신이 맺는 관계를 재설정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반복의 덧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유목적(遊牧的) 존재 방식을 삶의 질적 변화의 계기로 삼겠다는 허정원의 미적 직관의 결과이다. 우선적으로 애초에 캔버스로 수용한 이미지들의 지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추상(抽象)하다보면 더 이상 부재(不在)라 할 수 없는 존재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다.

자신의 이동의 길에 동반한 것들로부터 이동의 삶을 차력하여 그들 동반자로서의 이미지들을 현실의 두터움으로부터 순화시키는 추상, 그 추상의 파동이 울려 퍼지는 허정원의 그림에는 흩트려져 있는 세상에 반응하기 위한 수수께끼 같은 겹침의 갈무리가 숨어 있다. 그것을 위한 형식적 기법은 트레팔지(trepal paper)를 사용한 레이어(layer) 방식에 기반 한다. 완성된 그림 속에는 먼저 그려진 다른 그림들이 레이어로서 층층을 이룬다. 물론 각 레이어에 펼쳐진 이미지는 또 하나의 목적지로 이동해가는 사유의 경험과 유동하는 정체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트레팔지로 인하여 레이어들 사이의 존재론적 연관은 보일 듯 말 듯 하게 은폐되지만, 허정원에게 은폐는 다시 궁극의 존재의 ‘나타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이데거의 “탈은폐하는 밝힘(Lichtung)”을 떠올리게 하는 허정원의 이러한 존재론적 탐구 방식은 여리고 희미한 그녀의 그림을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보게 한다.

 

 

 자신의 유목적 존재성을 건네기 위해 이렇게 은폐와 탈은폐의 과정을 잇대는 것은, 레이어의 형식적 겹 속에 침묵하고 있는 풍경들과 나누었던 존재 경험을 최종적으로 불러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감상자들이 레이어 저편의 다른 차원을 통합적으로 읽어낼 때 만나게 되는 그 존재의 고유성은, 다시 한 번 하이데거의 개념을 빌리자면, 일종의 ‘놀이(Spiel)’의 진행을 거쳐야 드러난다. 그런데 허정원의 그림에서 엿보이는, 혹은 그림이 제안하는 ‘자기’를 찾는 예술적 투쟁은 테트리스 게임에서 공포로 작용하는 벽돌의 가속도를 피하며 옹색하게 자기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겨져 있음으로부터 그 모습의 숨어있지 않음에로 이끌어오는 산출행위로서의 놀이에 있는 것 같다. 즉, 허정원의 레이어는 과거의 멈춤이지만 진리 표현의 현재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허정원의 예술이 보이는 추상과 겹침의 형식은 결국 지나온 이동의 길목에서 맞닥뜨렸던 세상 풍경과 그로 인한 존재의 성찰을 우선은 그대로 ‘있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 후 그 풍경을 감추는 듯 드러내어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온전하게 찾겠다는 탐구적 사유를 지속시켜주는 도구로 쓰인다. 존재의 비밀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만 의존하여 우리는 흔히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과연 그것만으로 본질의 진리에 대한 숙고가 완성될 수 있을까? 그녀의 풍경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게 한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사용한 추상과 겹침은 전통적인 재현 회화의 권위로부터 가장 적게 구속받는 예술적 형식들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오히려 익숙한 감상 안내를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형식 선택과 더불어, 존재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예술의 한 가능성을 본다. 허정원식 풍경화의 존재 탐구는 자신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문명비판적인 시도보다는 자신의 몸이 경험한 인식의 깊이를 마침내 ‘그려내야 할 것’으로 바꾸는 미학적 성찰에 가깝다. 어찌 보면 관찰 같고 어찌 보면 반성 같은 허정원의 그림이 단지 시공의 알리바이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허정원의 캔버스를 그녀의 몸에 비유했다. 몸에는 삶의 깊이가 새겨져 있다. 미래를 방비하거나 어떤 해방을 기약하는 데 그녀의 예술은 몸이 기념하는 일상의 범속함과 물질적 감각 등을 명철하게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미지들을 집적하고 첨가하고 병행하면서 과거의 것의 질과 의미를 인용한다. 몸의 거짓 없는 교통과 내적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래의 결을 볼 줄 알아야 하기에, 허정원의 존재탐구는 몸의 섬세한 기관들의 복잡함을 열어젖힐 수 있는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상상력을 요구한다. 우리는 몸이 “바람결 사이로 어루만지듯” 느끼는 그 복잡함의 복원력을 허정원의 그림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